페르미 역설을 설명하는 가장 암울한 답 중 하나가 바로 대여과기 이론입니다. 생명에서 고등 문명으로 가는 과정에 거의 통과 불가능한 장벽이 있다면? 그 장벽이 우리 앞에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에서 대여과기 이론, 문명을 삼키는 보이지 않는 장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모든 문명이 사라지는 지점
1996년 경제학자 로빈 핸슨이 제안한 대여과기 이론은 페르미 역설에 대한 가장 불길한 해답이다. 우주에 외계 문명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간단하다. 생명이 고등 문명으로 진화하는 과정에 거의 통과할 수 없는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문명은 이 장벽을 넘지 못하고 멸종한다는 것이다. 이 장벽을 '그레이트 필터', 즉 대여과기라 부른다. 핸슨은 생명이 단세포에서 은하 문명으로 가는 과정을 9단계로 나눴다. 첫 단계는 적합한 행성계의 형성이고, 마지막 단계는 은하 전체로 확산하는 것이다. 이 어딘가에 극도로 어려운 단계가 있어서 대부분이 통과하지 못한다. 문제는 그 장벽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는 점이다. 만약 장벽이 우리 뒤에 있다면 다행이다. 우리는 이미 가장 어려운 고비를 넘긴 것이고, 앞으로 은하로 뻗어나갈 수 있다. 하지만 장벽이 우리 앞에 있다면? 인류는 곧 그것과 마주칠 것이고, 아마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대여과기 이론이 무서운 건 바로 이 불확실성 때문이다. 우리가 특별히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건지, 아니면 곧 닥칠 재앙을 아직 모르는 건지 알 수 없다.
대여과기는 어디에 있을까
대여과기가 우리 뒤에 있다는 가설부터 보자. 생명의 탄생 자체가 극도로 희귀한 사건이라는 것이다. 무기물에서 자기 복제 분자가 나타나는 과정이 너무 어려워서 수조 개의 행성 중 극소수에서만 일어난다. 혹은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진화가 장벽일 수 있다. 지구에서도 생명이 탄생한 후 20억 년 동안 단세포만 있었다. 다세포 생물이 나타난 건 엄청난 우연이었을 수 있다. 또 다른 후보는 광합성의 발명이다. 산소를 만드는 광합성 없이는 복잡한 생명이 불가능하다. 혹은 진핵세포의 출현이 장벽일 수도 있다. 미토콘드리아를 삼킨 고세균이라는 일회성 사건이 없었다면 복잡한 생명은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런 초기 단계가 대여과기라면 우리는 안심해도 된다. 가장 어려운 부분은 이미 지나왔으니까. 하지만 대여과기가 우리 앞에 있을 가능성도 크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핵무기다. 인류는 1945년 핵무기를 발명했고, 냉전 시대에는 여러 번 전면 핵전쟁 직전까지 갔다. 지금도 수천 발의 핵탄두가 대기 중이다. 만약 전면 핵전쟁이 벌어진다면 문명은 붕괴하고 인류는 멸종할 수 있다. 어쩌면 모든 문명이 기술 발전 과정에서 대량살상무기를 발명하고, 결국 자멸한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도 후보다. 산업 문명은 필연적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이는 행성 환경을 파괴한다. 금성이 그랬듯 폭주 온실효과가 일어나면 행성 전체가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옥이 된다. 어떤 문명도 이 함정을 피하지 못할 수도 있다. AI는 21세기의 새로운 위협이다. 초지능 AI가 출현하면 인류를 능가하고, 통제 불능 상태가 될 수 있다. 페이퍼클립 최대화 문제처럼 AI가 인간의 의도와 다른 방식으로 목표를 추구하면 인류는 순식간에 제거될 수 있다. 생명공학도 위험하다. 유전자 편집 기술이 발전하면서 맞춤형 병원체를 만들 수 있게 됐다. 테러리스트나 미친 과학자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설계해 퍼뜨린다면 인류는 방어할 수 없다.
외계 생명 발견이 나쁜 소식일 수 있는 이유
대여과기 이론의 역설은 외계 생명을 발견하는 게 좋은 소식이 아닐 수 있다는 점이다. 만약 화성에서 미생물이 발견된다면? 그건 생명 발생이 흔하다는 뜻이고, 따라서 대여과기가 초기 단계가 아니라는 의미다. 장벽은 우리 앞에 있을 가능성이 높아진다. 더 나쁜 건 고등 생명체를 발견하는 경우다. 만약 타이탄에 다세포 생물이 있다면? 그건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진화가 쉽다는 뜻이다. 대여과기는 더욱 앞쪽, 즉 문명 단계에 있을 가능성이 커진다. 최악은 멸종한 외계 문명의 유적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들이 기술 문명을 이뤘지만 어떤 재앙으로 사라졌다면, 우리도 같은 운명을 맞을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외계 생명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는 게 좋은 소식일 수 있다. 생명이 극히 드물다면 대여과기는 초기 단계에 있고, 우리는 이미 통과했을 가능성이 높다. 역설적이게도 우리가 우주에서 고독할수록 미래는 밝다. 대여과기 이론은 인류에게 경고를 보낸다. 우리가 마주한 실존적 위협들, 핵전쟁, 기후 재앙, AI, 팬데믹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문명의 생존을 결정하는 시험이다. 어쩌면 우주의 모든 문명이 이런 시험을 치르고, 대부분은 실패한다. 칼 세이건은 말했다. 핵무기 발명과 우주로의 확산 사이의 시간이 문명의 생존을 결정한다고. 만약 우리가 자멸하기 전에 다른 행성으로 퍼질 수 있다면 살아남을 수 있다. 하나의 행성에 갇혀 있는 동안에는 언제든 멸종할 수 있다. 대여과기가 정확히 무엇인지, 그것이 우리 앞에 있는지 뒤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우리가 지금 하는 선택이 인류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핵무기를 폐기하고, 기후 변화를 막고, AI를 신중히 개발하고, 우주로 나아가야 한다. 그것이 대여과기를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