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10km 대회였다. 첫 번째는 완주가 목표였고, 이번엔 기록이 목표였다. 훈련을 두 달 했다. Zone 2, 인터벌, 주 3회 달리기, 빠지지 않고 했다. 5'45"/km 목표 페이스로 달리면 1시간을 조금 넘게 완주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다. 충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1시간 18분이었다. 목표보다 18분이 늦었다. 달리기 앱으로 나중에 분석해보니 원인이 명확했다. 첫 1km 페이스가 5'05"였다. 목표 페이스보다 40초 빨랐다. 나는 스스로 무너진 것이었다.
이 글은 그날의 기록이다. 부끄럽지만 정확하게 쓰려고 한다. 같은 실수를 하려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한다.
대회 당일 페이스를 망친 뼈아픈 경험과 교훈
5'05"
실제 첫 1km 페이스 (목표 5'45")
+18분
목표 대비 초과된 완주 시간
5km
페이스가 완전히 무너지기 시작한 지점
출발 전 나의 상태 — 이미 뭔가 이상했다
대회장에 일찍 도착했다. 스타트 라인 쪽에 수천 명이 모여 있었다. 그 에너지가 전염됐다. 주변 사람들이 달리기 전부터 발을 가볍게 구르거나 스트레칭을 하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몸이 달아올랐다.
출발 전 심박수를 봤다. 이미 125bpm이었다. 서 있기만 해도. 훈련 때 Zone 2 달리기를 시작할 때와 비슷한 심박수였다. '오늘 엄청나게 잘 달릴 수 있겠다'는 착각이 그때부터 생겼다. 그게 함정이었다.
🚨 대회 출발 전 흥분 심박은 오버페이스의 전조다 대회장 분위기, 응원 소리, 주변 러너들의 에너지가 심박을 올린다. 출발 전 심박이 이미 높다는 것은 몸이 과흥분 상태라는 신호다. 이 상태에서 출발하면 페이스가 실제보다 훨씬 쉽게 느껴진다. 그 착각이 초반 오버페이스의 원인이다.
그날 km별로 어떤 일이 일어났나
1km
0~1km — 출발 직후
이상하게 몸이 가벼웠다 — 나쁜 신호였다
출발 총성이 울리고 뛰기 시작했다. 앞 사람들이 빠르게 달렸고 나도 자연스럽게 그 흐름에 합류했다. 숨이 전혀 차지 않았다. '오늘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했다. 앱이 1km를 알렸다. 5'05". 숫자를 보고 잠깐 멈칫했지만 '괜찮겠지, 몸이 좋으니까' 하고 그냥 달렸다. 그게 이 레이스의 결말을 결정한 순간이었다.
5'05" — 목표보다 40초 빠름
3km
1~3km — 이상 신호 시작
2km에서 처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2km를 넘어서면서 허벅지 앞쪽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숨도 조금씩 가빠졌다. 3km 페이스를 봤다. 5'22". 그래도 목표보다 빠른 페이스였다. '지금 빠른 만큼 나중에 여유가 생기겠지'라는 말도 안 되는 논리를 스스로 만들었다. 페이스를 낮추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5'22" — 여전히 빠름
5km
3~5km — 벽
5km에서 다리가 납 덩어리가 됐다
4km부터 이상이 왔다. 보폭이 줄기 시작하고, 팔 움직임이 느려졌다. 5km를 넘자마자 허벅지가 굳는 느낌이 왔다. 에너지가 고갈됐다. 나중에 확인해보니 이 구간 심박수가 188bpm이었다. Zone 5에서 계속 달렸던 것이다. 글리코겐이 이미 바닥난 상태였다.
5'58" — 급격히 느려짐
7km
5~7km — 붕괴
6km에서 처음으로 걸었다
6.4km 지점에서 멈췄다. 달리는 게 아니라 그냥 발이 안 올라갔다. 응급 걷기를 2분 정도 했다. 다시 달리기 시작했지만 페이스가 7분대로 떨어졌다. 그냥 완주만 하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목표 기록은 이미 포기한 순간이었다.
6분대 후반 — 사실상 포기
완주
7~10km — 생존
뛰다 걷다 결국 완주했다
남은 3km는 뛰다가 걷기를 세 번 반복했다. 결승선을 통과했다. 1시간 18분. 시계를 보고 그냥 주저앉았다. 메달을 받았는데 그게 뭔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완주는 했지만 내가 원한 달리기가 아니었다.
최종 1:18:XX — 목표 초과 18분
달리는 내내 머릿속에서 일어난 것들
1km 직후 5'05"이네. 빠르긴 한데, 몸이 이렇게 가벼운데 이 페이스로 가도 되지 않나. 훈련 때보다 훨씬 잘 달리는 것 같은데.
3km 구간 좀 힘들어지긴 했는데, 반이 넘으면 나아지겠지. 초반에 번 시간이 있으니까 나중에 조금 느려져도 목표 페이스는 맞출 수 있어.
5km 직후 아. 이게 아닌데. 다리가 왜 이래. 1km 때 속도를 낮췄어야 했는데. 지금 낮추면 너무 늦은 건가. 아직 5km가 남았는데.
7km 이후 기록은 포기했다. 그냥 완주만 하자. 뛰어서 들어가기만 해도 된다. 다음에 잘하면 된다. 그냥 걷자. 조금만 걷고 다시 뛰자.
5km 지점에서 처음으로 '1km 때 왜 페이스를 안 낮췄지'라는 후회가 왔다. 늦어도 너무 늦은 후회였다. 그때 이미 탱크가 비어 있었다. — 대회 당일 저녁에 쓴 메모
나중에 데이터로 확인한 정확한 원인들
40초
첫 1km에서 목표보다 빠르게 달린 정도
단 40초의 초과 페이스가 나머지 9km를 망쳤다. 1km에서 40초를 번 대가로 후반 5km에서 8분 이상을 잃었다. 초반 페이스 컨트롤이 레이스의 전부라는 걸 그날 배웠다.
실수
훈련 때와 달랐던 점
다음에는
첫 1km 오버페이스
훈련 때 혼자 달릴 때는 없던 주변 러너 영향
출발 후 200m는 반드시 목표보다 느리게
심박 확인 안 함
페이스만 봤고 심박수는 한 번도 안 봤음
첫 2km 심박 160bpm 이하 유지 원칙
이상 신호 무시
2km 허벅지 달아오름을 그냥 통과
불편함 느끼면 즉시 5~10초 페이스 줄이기
에너지젤 타이밍 놓침
5km 기점에서 먹으려 했는데 이미 힘들어서 못 챙김
4km에서 미리 먹기, 위기 전 보충
군중 페이스에 끌림
앞 사람 따라 자연스럽게 빠르게 출발
대열 뒤쪽에서 출발, 사람 피해 달리기
이 경험에서 나온 교훈들
교훈 01
대회장 에너지는 마약이다
훈련 때와 달리 대회장엔 응원, 함성, 다른 러너들의 에너지가 있다. 이것이 실제보다 훨씬 쉽게 달릴 수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그 착각에 속으면 안 된다. 몸이 가볍게 느껴질수록 페이스를 더 신경 써야 한다.
교훈 02
초반 페이스가 레이스의 전부다
첫 1~2km를 목표보다 느리게 달리는 것이 손해처럼 느껴지지만 사실은 이득이다. 초반에 번 시간은 후반에 두 배로 잃는다. 초반 절약이 후반 가속의 연료가 된다. 마이너스 스플릿(뒷부분을 더 빠르게)이 정석인 이유가 있다.
교훈 03
심박수를 무시하면 안 된다
페이스만 보면서 달리는 것과 심박수를 같이 보면서 달리는 것은 다르다. 심박이 170bpm을 넘으면 그게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신호다. 심박 알림을 설정해두고, 알림이 울리면 무조건 페이스를 낮추는 것이 다음 대회의 원칙이 됐다.
교훈 04
군중 속에서 혼자 달리는 법
앞 사람이 빠르게 가도 내 페이스를 지켜야 한다. 그러려면 대열 뒤쪽에서 출발하는 게 낫다. 앞이 비어있으면 자연스럽게 빠르게 달리게 된다. 뒤에서 출발하면 오히려 내 페이스를 유지하기가 더 쉽다.
다음 대회에서 달리 할 것들
1
출발 후 1km — 목표 페이스보다 10~15초 느리게 시작한다
출발 흥분 상태를 감안해서 의도적으로 느리게 출발한다. 1km 알림이 울렸을 때 '너무 느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들면 딱 맞는 것이다. 반대로 '편하다'는 느낌이 들면 이미 빠른 것이다.
2
심박수 알림 — 165bpm 초과 시 즉시 페이스 낮추기
가민 워치에 165bpm 초과 진동 알림을 설정한다. 알림이 울리면 5~10초 페이스를 낮춘다. 이걸 두 번 이상 무시하면 안 된다는 원칙을 미리 세운다.
3
에너지젤 — 4km에서 먹는다, 허기지기 전에
위기가 오기 전에 보충한다. 5km가 되면 이미 늦다. 4km에서 에너지젤 하나를 먹고, 물을 마신다. 이게 후반 페이스를 유지하는 연료가 된다.
4
스타트 라인 — 대열 뒤쪽에서 출발한다
목표 페이스 기준 그룹보다 한 그룹 뒤에서 출발한다. 앞이 막혀있으면 자연스럽게 속도가 제어된다. 그리고 뒤에서 출발하면 후반에 앞으로 나가는 심리적 만족감도 생긴다.
✅ 대회 당일 페이스 컨트롤 — 딱 한 줄 원칙 출발 후 1km를 달리고 나서 '너무 느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그게 맞는 페이스다. '생각보다 편하다'는 느낌이 든다면 이미 빠른 것이다. 대회장의 흥분 상태에서 '편하다'는 감각은 믿으면 안 된다.
⚠ 오버페이스 초반 3가지 신호 — 무시하면 안 된다 2km 이전에 허벅지나 종아리가 달아오르는 느낌 / 호흡이 이미 무겁다는 느낌 / 심박수가 목표 Zone을 훌쩍 넘어선 상태. 이 중 하나라도 있으면 즉시 5~10초 페이스를 낮춰야 한다. '조금 있으면 나아지겠지'는 이 상황에서 틀린 말이다.
ℹ 마이너스 스플릿이란 레이스의 전반부보다 후반부를 더 빠르게 달리는 전략이다. 세계 마라톤 기록 대부분이 마이너스 스플릿으로 세워졌다. 초보 러너에게는 '후반에 더 빠르게'가 아니라 '후반에도 유지할 수 있는 페이스로 전반을 달리는 것'을 의미한다. 전반을 10~15초 느리게 달리고 후반에 같은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기록이 크게 개선된다.
그 레이스가 나쁜 경험이 아닌 이유
1시간 18분이라는 결과가 처음엔 창피했다. 훈련을 두 달이나 했는데 스스로 무너진 것이었으니까. 메달을 받고 나서도 한참 동안 멍했다.
그런데 집에 와서 데이터를 분석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실패의 원인이 너무 명확했다. 훈련이 부족했던 게 아니었다. 심폐 능력이나 근육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첫 1km에서 페이스를 안 지켰던 것이었다. 그 원인이 명확하다는 건, 다음에는 다르게 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뼈아픈 1시간 18분이 페이스 컨트롤을 몸으로 가르쳐줬다. 다음 대회가 기다려지는 이유가 그것이다. 이번엔 진짜로 해볼 수 있을 것 같다.